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천 상륙작전 (문단 편집) ==== 개요 ==== 인천상륙작전은 하루만에 완료되지 않았다. 최초의 상륙은 1시간만 이루어졌다. 이유는 만조가 1시간 정도 지속됐기 때문이다. 이후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가 다음 만조까지 12시간을 대기한다. 이렇게 하루 2회씩 5일간, 총 10회에 걸쳐 병력, 물자, 장비 등의 상륙작전을 진행했다.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. || [[파일:attachment/k27_10260171.jpg|width=100%]] || ||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Inchon_landing_map.jpg|width=100%]] || * [[월미도]] 제압(그린 비치): 해안포와 동굴진지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 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든다. 정확한 상륙위치는 월미도 북서쪽 해안으로 당시에는 소규모 해수욕장과 해수욕탕등이 존재하였다. * [[인천항]] 상륙(레드 비치):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한다. 가장 어려운 임무이므로 미해병대 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한다. 동시에 국군 해병대 제1연대가 UN군과 함께 상륙했다.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[[일본]]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를 긴급히 제작해서 공수했다고 한다. 아래 사진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다. 정확한 상륙 위치는 현재의 북성포구, 북성동 대한제분 공장 일대로 대한제분 공장 입구에 상륙지점 기념비가 있다. * 인천 남동부 상륙(블루 비치): 인천항에서 북한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우회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하여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북한군의 증원군을 차단한다. 정확한 상륙위치는 현재의 용현동 낙섬사거리로 지금은 매립되어 내륙이 되어버렸지만 상륙지점 기념비는 세워져 있다. 상륙 하루 전 9월 14일,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. *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.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.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. *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음.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.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. 스탈린은 미국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한반도에 파견한 공군도 소련군 소속이란걸 들키지 않기 위해 위장했다. 스탈린이 돕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어차피 상륙 하루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인천의 북한군을 도울 수가 없었다. 참고로 연합군 함대의 인천 집결 경로는 아래와 같다. || [[파일:연합군함대인천집결경로.jpg|width=100%]] || 1950년 9월 11일, 요코하마 : 미 육군 7사단 9월 11일, 고베 : 미 해병 제1사단 9월 12일, 부산 : 미 해병 제5연대, 국군 해병 제1연대 9월 12일, 사세보 : 마운트 맥킨리(인천상륙작전의 지휘함), 로체스터(제7함동기동부대의 기함) 요코하마, 고베에서 출항한 병력은 포인트 아이오와에서 사세보에서 출항한 함대와 합류한다. 이후 포인트 아칸시소에서 부산에 출항한 함대와 합류 후 9월 14일 포인트 캘리포니아를 지나서 '''1950년 9월 15일.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'''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다. 당시 규모는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, 구축함, 순양함 등 '''8개국 261척'''으로 미국 225척, 대한민국 15척, 캐나다 3척, 호주 2척, 뉴질랜드 2척, 네덜란드 1척, 프랑스 1척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